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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정리]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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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그루터기 작성일09-01-03 16:31 조회97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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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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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최효찬 지음

예담 / 2005년 8월 / 334쪽 / 13,000원

 

 

▣ 저자 최효찬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기자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같은 대학 비교문학 박사과정에서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일과 학업, 저술을 병행하며 ‘1인 3역’을 해 나가는 데는 대학 시절부터 저녁 이후면 약속을 접고 독서를 실천한다는 이어령 박사가 역할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그동안 『테러리즘과 미디어』를 비롯해 『아빠가 들려주는 경제이야기』, 『메모의 기술 2』 외 여러 권의 책을 출간했다.

 

▣ Short Summary

500년을 이어오는 명문가들은 과연 어떤 방법으로 자식교육을 했을까? 그토록 많은 인재를 배출해 낸 데에는 뭔가 특별한 자녀교육의 노하우가 있지 않을까?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은 인성교육과 생활교육을 중시했던 역사 속 위인들의 자녀교육 방식을 통해 현대의 부모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지침들을 조목조목 일러준다. 서애 류성룡 종가, 퇴계 이황 종가, 다산 정약용가, 경주 최부잣집 등 지조와 자긍심을 대대로 지켜오면서 자녀교육의 모범을 실천해 온 대한민국 대표 명문가들의 종가와 고택을 저자가 직접 찾아다니며 그들의 생생한 증언과 모습들을 담아낸 책으로, 가문의 전통을 세우고 자녀교육의 기틀을 마련했던 위대한 아버지들의 노하우와 저력을 배울 수 있다.

 

요즘은 ‘대치동 엄마’, ‘기러기 아빠’라는 신조어가 생겨날 만큼 교육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그러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자녀교육의 CEO를 자처하며 요즘의 대치동 엄마 못지 않은 적극성을 보였던 여러 명문가의 부모들을 만날 수 있다. 500년을 이어오는 명문가들의 공통점은 바로 이와 같은 자녀교육에 대한 열정과 헌신, 그리고 자식들에게 암묵적으로 영향을 끼친 아버지의 역할이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명문가들의 오랜 역사와 가학의 전통을 들려주는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은 가족이란 틀 안에서 행해졌던 종가의 교육법과 교훈적인 내용들을 통해 현재 부모들이 고민하는 문제들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던져주며, 더불어 자신의 자녀를 경쟁력 있는 인재로 키워내기 위한 해법도 알려준다.

 

▣ 차례

제1장 풍산 류씨, 서애 류성룡 종가

책 읽는 아버지가 되라 - 9대째 공직은 이유가 있다

명문가에게 배운다 1 - 평생 책 읽는 아이로 만들어라

 

제2장 고성 이씨, 석주 이상룡 종가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논어』를 가르치는 가풍

- 단 한 명의 과거 합격자를 배출하고도 명문가를 이어온 힘

명문가에게 배운다 2 - 자긍심 있는 아이로 키워라

 

제3장 재령 이씨, 운악 이함 종가

밑지고 살아라, 그러면 세상을 얻는다 -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상생相生의 철학

명문가에게 배운다 3 - 때로는 손해 볼 줄 아는 아이로 키워라

 

제4장 양천 허씨, 소치 허련 가문

학문이 얕으면 결코 붓을 들지 말라 - 강요하지 않는 재능, 5대째 화가를 길러낸 비결

명문가에게 배운다 4 - 스스로 재능을 발견하도록 기회를 제공하라

 

제5장 진성 이씨, 퇴계 이황 종가

훌륭한 친구와 함께 공부하라 - 500년을 이어온 ‘인맥네트워크’의 위력

명문가에게 배운다 5 - ‘공부에 뜻이 있는 아이끼리’ 네트워크를 만들어라

 

제6장 해남 윤씨, 고산 윤선도 종가

자녀를 ‘문화의 바다’에 빠뜨려라 - 400년을 이어오는 시詩, 서書, 화畵의 재능

명문가에게 배운다 6 - 세심하게 점검하여 질책하고 조언하라

 

제7장 나주 정씨, 다산 정약용가

반드시 서울 10리 안에서 살아라 - 유배지에서 전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당부

명문가에게 배운다 7 - 아버지가 자녀교육의 ‘매니저’로 직접 나서라

 

제8장 한양 조씨, 호은 종가

죽을 먹을지언정 더 넓은 세상으로 유학을 보내라

- 교육은 가장 적게 투자하고 가장 확실하게 남기는 장사

명문가에게 배운다 8 - 최상의 교육 기회를 제공하라

 

제9장 파평 윤씨, 명재 윤증 종가

‘노성 윤씨 주식회사’의 CEO들, 종학당을 만들다 - 조선 최초의 ‘원스톱’ 영재교육 프로그램

명문가에게 배운다 9 - 아이들의 ‘멘토’가 되라

 

제10장 경주 최씨, 경주 최부잣집

만석의 재물은 사라졌지만 ‘육훈’과 ‘육연’은 살아 있다 - 300년을 이어온 가훈의 승리

명문가에게 배운다 10 원칙을 정하고 끝까지 실천하라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최효찬 지음

예담 / 2005년 8월 / 334쪽 / 13,000원

 

프롤로그

 

“자식 하나 키우기가 왜 이렇게 힘들까.” 자녀를 둔 부모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해보는 말이다.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 역시 예외는 아니다. 열 살짜리 아들이 하나 있는데 아이를 키우다 보면 당황스러울 때가 참 많다.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나아가 자녀교육은 어떻게 해야 할지 그 해법을 구하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이런 궁금증이 일었다. 500년을 이어오는 명문가들은 어떤 방법으로 자녀들을 교육했을까, 그들에게는 뭔가 특별한 자녀교육의 노하우가 있지 않을까?

 

지극히 평범한 호기심에서 출발했지만, 명문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과연!”이란 말이 절로 나올 만큼, 명문가에는 저마다 놀라운 자녀교육의 비결들이 수백 년에 걸쳐 대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모든 진리가 그렇듯이 그 노하우는 결코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누구나 실천할 수 있을 정도의 평범한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거기에는 특별한 그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500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비결은 바로 ‘평범한 원칙’을 한두 대에 그치지 않고 수백 년 동안 지켜오며 실천해 온 데 있었다. 명문가들은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자신들만의 자녀교육법을 통해 수많은 인재들을 길러 명가(名家)의 전통을 유지해 오고 있었던 셈이다.

 

 

제1장 풍산 류씨, 서애 류성룡 종가 : 책 읽는 아버지가 되라

 

요즘 고위공직자들 가운데 자녀들이 무슨 책을 읽으며, 제대로 공부하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조언하는 이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국무총리가 아니라 사무관급 공무원이나 대기업의 임원만 돼도 요즘 아버지들은 ‘바쁘다’는 그럴듯한 핑계를 대며 자녀교육을 어머니에게 맡겨놓기 예사다. 아버지는 자녀교육에 필요한 돈만 벌어다주면 제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전후의 혼란기에 영의정 등 최고위 공직을 지낸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은 바쁜 와중에도 자녀들에게 편지를 보내며 학문을 점검하고 독려하는 한편으로 따끔하게 질책하고 조언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산사에 들어간 자녀들이 공부를 게을리 하자 자녀들에게 ‘어린 시절 산사의 적막한 등불 아래서 읽은 책이 평생 동안의 나침반 역할을 해주었다’는 퇴계의 시를 들려주며 공부에 매진하기를 당부했던 것이다.

 

그럼 서애 자신은 어떻게 살았을까? 아이들에게 부모의 모범만큼 더 훌륭한 교육은 없다. 서애가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것이 바로 서애의 독서습관이다. 서애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위기의 시대를 살았지만 항상 집에서는 독서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집에서 항상 책을 읽으며 다섯 아이들에게 모범을 보였다고 한다. 서애는 퇴계 이황으로부터 “그는 하늘이 내린 인물이다”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네 살 때부터 붓을 잡기 시작해 66세로 죽을 때까지 붓을 놓지 않았던 당대의 훌륭한 선비였다.

 

서애는 독서로 입신한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그는 열여덟 살 때 관악산으로 들어가 절에서 몇 달 동안 <맹자>를 스무 번이나 읽어 처음부터 끝까지 암송했다. 또 이듬해에는 고향인 하회에서 <춘추>를 서른 번도 넘게 읽었는데, 이때부터 문장 짓는 법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고 한다. 서애는 처음부터 과거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 <맹자>와 <춘추> 등을 암송했으며, 이것이 도움이 되어 과거에 급제할 수 있었다. 이는 과거에 합격하기 위한 ‘점수 따기’식 공부가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닦는 기초적인 공부, 즉 경전에 충실하라는 스승 퇴계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다. 서애는 자신의 이런 경험을 자식들에게 끊임없이 일깨워주었다.

 

책 읽는 집안에서 인재가 난다는 옛말이 있다. 서애의 형제뿐만 아니라 서애의 후손들까지도 대대로 9대째 벼슬에 오르는 위업을 달성했다. 물론 음직(국가에 공을 세웠을 경우 그 자손에게 벼슬을 주는 제도)도 있었고 과거에 급제한 경우도 있었지만, 노론의 정권 장악으로 대부분 남인인 영남인들의 벼슬길이 막힌 조선 후기의 상황을 감안하면 9대째 대대로 공직에 나아가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영남의 남인 집안 대부분이 일찌감치 벼슬길을 포기하고 학문과 후학을 가르치는 데 전념하였고, 이들 중에는 몰락양반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많았음을 볼 때 책 읽는 전통의 중요성은 크다고 할 수 있다.

 

서애 류성룡의 종택인 충효당(보물 제414호)에는 현재 서애의 14대 종손인 류영하 씨와 종부 최소희 씨가 살고 있다. 류영하, 최소희 부부는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서애 종손의 자녀교육은 여느 집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차종손 창해씨는 직장 때문에 대구에서 살고 있다. 분가해 사는 차종손을 위해 고육지책으로 택한 것이 바로 전화를 통한 종손 교육이다. 창해 씨 부부는 부모님께 일요일마다 문안 전화를 드린다고 한다. 공부를 핑계 대거나 다른 이유를 댈 수 없으며, 이유 불문하고 일요일에는 반드시 문안 전화를 드려야 한다. 서애가의 자녀교육에서 주안점을 두는 것은 청렴과 근검절약이다. 서애 가문은 예부터 청렴하고 검소한 가풍을 이어왔으며, 그의 후손들도 조선시대에 청백리로 존경받았던 서애 할아버지의 유지(遺旨)를 본받으려고 애쓴다.

 

후손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선대들의 업적도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는 법이다. 서애처럼 자녀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그 후손들도 사회적으로 성공해 가문의 전통을 잘 이어 나가게 되고, 후손은 또 선대의 업적을 세상에 알리며 기릴 수 있다. 결국 이 모두가 바른 자녀교육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풍산 류씨 후손들은 현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어쩌면 난세에 서애가 보인 화합과 절충의 리더십이 후손들에게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서애 후손으로는 유도발이 경술국치를 당하자 일제에 항거하며 단식으로 순국했고, 이어 그의 아들 류신영도 일제에 저항해 67세에 자결했다.

 

 

제2장 고성 이씨, 석주 이상룡 종가 :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논어를 가르치는 가풍

 

1910년 온 가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나선 할아버지는 며느리에게 <논어>와 <맹자> 등에서 여성에게 꼭 필요한 덕목을 뽑아 ‘맞춤식 과외’를 했는데, 평소에는 시간이 없어 짧은 산후조리 시간을 이용했다고 한다. <논어>를 배운 그 며느리는 아들에게 <맹자>를 가르치고,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는 청년들을 모아 글을 가르쳤다. 그때 아버지에게 글을 배운 아들은 대학을 나와 교사가 되어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내고 있으며, 그의 자녀도 아버지를 이어 교사의 길을 걷고 있다. 여기서 할아버지는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아들 이준형이고, 아버지는 석주의 손자 이병화이며, 며느리는 그의 부인 허은이다. 또 그 아들은 중앙중학교 이범증 교장이고 자녀는 이범증의 딸로 풍문여고 교사인 이윤명이다. 이범증의 부인과 두 딸은 모두 고려대 동문이며 3명이 교사로 재직중이다.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은 이범증 교장의 증조부로 경상북도 안동시 법흥동에 있는 500년 된 고택 임청각을 지키던 고성 이씨 종손이다. 석주는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제 병합하자 서간도로 50여 명이나 되는 가족을 이끌고 망명해 독립운동을 펼쳤다. 마치 로마의 귀족이 전쟁 때마다 평민들보다 먼저 전장으로 달려가 몸을 바쳤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석주를 비롯해 독립운동으로 건국훈장을 받은 이가 가까운 친족만 해도 9명에 달하고 처가까지 합치면 47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런 반면 안동에 정착한 지 500여 년, 22대에 걸쳐 석주 가문에서 과거에 합격해 벼슬길에 나아간 이는 이후영 단 1명에 불과했다. 이는 엄청난 아이러니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 집안이 500년 동안 명문가를 유지해 온 노하우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범증 교장이 말한 첫 번째 노하우는 “어떠한 위기 상황에서도 자녀교육만은 결코 소홀하지 말라”는 것이고, 다음으로는 “명가로서의 당당한 자긍심”이었다.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유산은 바로 역사와 후세 앞에 당당할 수 있는 자긍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녀교육에서도 이것보다 더 중요한 덕목이 있을까요? 자녀교육은 단지 지식을 가르치기보다 어떻게 처신하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범증 교장의 말처럼 고성 이씨 사람들은 늘 당당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그들은 먼저 나라를 구하는 데 앞장섰다. 그런 그들에게 가문에 대한 열등감이 있을 리 없다. 오히려 그들은 선조들이 몸소 실천했던 그 고귀한 정신을 닮으려 노력할 것이다.

 

임청각 종손들에게 교육은 첫 번째로 중요한 덕목이다. 학문에 힘써온 수백 년 간의 전통을 이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명문가의 정신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은 3대에 걸쳐 의원이라야 약에 효험이 있다고 했고, 또 3대에 걸쳐 글을 읽어야 다음에 제대로 된 문장이 나온다고 했다. 그만큼 명문가를 만들고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석주 이상룡과 그 자손들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오직 한 가지 게을리 하지 않은 것이 바로 학문과 교육이다. 지금도 임청각 후손들이 자긍심을 가지는 것이 바로 시(詩), 서(書), 화(畵) 등을 중시하는 학행(學行, 학문과 덕행)의 가풍이다. 특히 글씨를 즐겨 쓰는 가학의 전통은 무려 20대에 걸쳐 서첩이나 시문집을 펴냈을 정도이다.

 

임청각의 선조들은 학행을 실천하기 위해 250년 전에 일종의 학술모임인 ‘문회계(文會禊)’를 만들었다고 한다. 요즘으로 말하면 ‘아카데미’나 ‘학회’와 같은 것으로, 문회계를 만들면서 이것이 계기가 되어 자녀들을 교육하는 전통이 그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유교경전 중 하나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효경(孝經)>의 판본을 임청각이 소장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학행의 전통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아울러 모든 종손들이 문집이나 서첩을 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이러한 학행이 바탕이 되어 지방 명문가들과의 결혼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예나 지금이나 결혼을 위해 고위공직에 있는 집안이나 부유층보다 학문이 높은 집안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데 임청각이 여기에 해당한다.

 

 

제3장 재령 이씨, 운악 이함 종가 : 밑지고 살아라, 그러면 세상을 얻는다

 

“대접받고 싶거든 먼저 대접하라”는 성경 구절은 유대인들의 자녀교육에서 고전으로 통하는 율법이다. 이러한 철학을 500여 년 전부터 자녀교육에 적용해 온 명문가가 있다. 바로 재령 이씨 영해파 운악 종가이다. “지고 밑져라.” 운악 종가 17대 종손인 이용태 삼보컴퓨터 창업자는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러한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맨손으로 삼보컴퓨터를 창업하고 국내 정보통신업계의 대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할아버지는 항상 자신보다 남을 먼저 배려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어릴 때 동네 아이들에게 맞고 들어오면 칭찬을 해주셨고 반대로 때리고 들어오면 크게 혼을 내셨어요. 할아버지는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으셨지만 남을 해치지 않는 인간관계를 염두에 두셨던 것 같아요. 할아버지의 가르침은 제 평생의 이정표였고 기업 경영에도 그대로 적용하는 대원칙이 되고 있어요.”

 

이용태는 경북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의 재령 이씨 영해파 운악 종가인 충효당에서 1933년에 태어났다. 충효당은 운악(雲嶽) 이함(李涵, 1554~1632)의 조부 이애가 영해부사인 숙부를 따라 이곳에 와 정착하면서 지은 집이다. 이애는 이곳 토호의 외동딸과 결혼해 단숨에 명가의 초석을 다질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조선시대 명가의 전형적인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명가들은 먼저 부를 쌓은 후에 그 후손들이 벼슬이나 학문을 통해 사회적 지위에 오름으로써 명가로 거듭나는 과정을 거쳤어요. 우리 집안도 그래요. 이애 할아버지가 외동딸과 결혼하면서 큰 재산을 상속받은 덕에 단숨에 상류층으로 올라갈 수 있었던 겁니다.” 이용태는 퇴계 학맥을 이어온 정통 유학자의 후예로 유년시절부터 고리타분할 만큼 옛날 방식대로 살았다고 한다. 이용태는 미국 유학 중에도 매일 부모님께 문안편지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격대교육(隔代敎育)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할아버지가 손자, 할머니가 손녀를 맡아 잠자리를 함께 하면서 교육한다는 의미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교육하면 감정에 휩쓸리기 쉬워 오히려 자녀교육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즉 부모는 자녀에 대한 기대가 높고 욕심이 앞서 자녀가 잘 따라오지 않는다고 화를 내며 질책을 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아이는 주눅이 들어 마음속에는 저항심이 생기는 탓에 교육이 제대로 될 리 없다. 이런 때에는 지혜와 경륜을 갖춘 할아버지가 감정을 통제하며 자녀들을 교육하기에 더 적격일 수 있다. 이러한 격대교육은 우리 선조들이 예전부터 해오던 자녀교육의 한 방식이었다.

 

이용태는 자녀교육에 관한 한 솔선수범을 보인다. 그는 자녀교육에 ‘사랑방문화’를 접목하고 있다. 그는 집에 사람을 초대하거나 손님이 방문하면 반드시 어린 자녀들을 불러 대화하고 토론하는 것을 듣게 했다. 보통 가정에서 어른들이 오면 아이들은 얼씬도 못하게 하고 놀기 십상인데 이용태는 달랐다. 반드시 동석을 시켜 어른들의 대화와 토론 문화를 엿보고 익히도록 했던 것이다. 그는 이게 바로 ‘산교육’이라고 말한다. 함께 어울려 살아가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토론 문화를 일찍부터 익힐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토론의 중요성은 기업 문화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고 이용태는 말한다. 복잡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해 당사자끼리 모여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찾는 대화와 토론 교육이 제대로 되어야 기업이나 사회, 국가가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제4장 양천 허씨, 소치 허련 가문 : 학문이 얕으면 결코 붓을 들지 말라

 

한 가문에서 인재 한 사람을 키우기도 쉽지 않은데, 5대째 화가를 길러낸다는 것은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전남대 미대 교수인 허진은 바로 소치 허련에서 시작되어 5대째 화가의 길을 걷고 있는 운림산방의 후예다. 미대를 졸업하고 미대 대학원에 재학중인 예비 화가까지 포함하면 소치 후손으로만 13명에 이른다고 하니, 아마도 이런 경우는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더구나 한반도의 서남쪽 구석 척박한 섬에서 어떻게 이런 명문 예술가의 집안이 형성될 수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비결은 바로 냉정한 대물림에 있었다. 자칫 그림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집착이 강할 경우 가족의 정에 이끌려 분별력을 잃을 수도 있지만, 소치 가문에는 이러한 틈을 허용하지 않은 냉철한 혜안이 있었다. 허진은 그 비결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첫째, 붓 재주 하나로는 성가(成家)할 생각을 말라. 소치는 훌륭한 화가로 성장하려면 붓재주보다는 사람의 됨됨이와 높은 학덕이 앞서야 한다고 믿었다. 그림의 생명은 문기(文氣)에 있고 그 문기는 시서화, 이 3가지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소치는 비록 손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시(詩)와 서(書)가 얕은 한 대가의 경지에 오르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4남인 미산의 솜씨를 칭찬하지 않았다. 또한 중요한 것은 자녀들에게 화가의 길을 가라고 강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소치는 재능이 없는데도 길을 가려 할 때는 자신의 아들이지만 오히려 그 길을 만류했다.

 

둘째, 먹을 항상 입에 달고 다녀라. 부지런하지 않으면 화가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할아버지인 남농 허건은 항상 6시에 일어나 하루에 두세 점씩 그림을 그린 뒤 밤 10시가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고, 평생 한 번도 낮잠을 잔 적이 없다고 한다. 남농은 손자가 최고 대학의 미대에 합격해도 별로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내심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했다는 이야기를 할아버지 사후에야 친지로부터 전해들을 수 있었다. 아마도 자만심을 경계해 손자에게 직접 칭찬을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셋째, 인연의 소중함을 잊지 말라. 해남의 울돌목을 건넌 가난한 청년 소치가 남종문인화의 거목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녹우당(고산 윤선도의 집이자 다산 정약용의 외가)과의 인연과 더불어 초의선사 그리고 추사 김정희로 이어지는 큰 스승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명성은 이들의 입을 통해 번져 나갔고 마침내 소치는 임금 앞에서 그림을 그리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결국 소치는 당대의 최고수들을 스승으로 만나는 인연이 있었기에 대성할 수 있었다.

 

허진의 어머니는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기꺼이 베풀었다고 한다. 친구들도 ‘어머니 때문에 허진을 미워할 수 없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런 베품의 정신은 전통적인 명가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덕목으로, 옛 사람들은 ‘적선지가(積善之家) 필유여경(必有餘慶)’, 즉 ‘남에게 베푸는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로운 일들이 생긴다’고 말했다. 그런 어머니도 아들에게만큼은 엄격한 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공부를 잘하고 출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 구실을 제대로 못하면 자신뿐만 아니라 부모 형제가 비난받을 수 있다면서 항상 처신에 주의할 것을 당부했다. 허진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어머니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힘을 주셨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또 어머니의 베품의 정신 또한 잊지 않고 있다고 한다.

 

 

제5장 진성 이씨, 퇴계 이황 종가 : 훌륭한 친구와 함께 공부하라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은 율곡 이이와 함께 조선 유학의 최고봉에 올라 나란히 한국을 대표하는 인물로 존경받는다. 그는 수많은 제자를 길러 영남학파를 만든 조선 최고의 유학자였지만 제자나 자녀교육 방법에서 커다란 획을 그은 위대한 교육자이기도 했다. 퇴계는 요즘 유행하는 표현을 빌리면 자녀들과 제자들에게 ‘인맥네트워크’를 구축해 주려고 무척 애를 썼다. 특히 학문이 깊고 똑똑한 제자가 있으면 아들과 손자, 다른 제자들에게 소개해 주고 함께 공부하게 했다고 한다. 뜻을 같이하는 친구끼리 더불어 공부하면 능률이 오른다며 이를 적극 권했던 것이다. 학문하는 사람은 좋은 벗을 얻어야 서로 도움을 주며 더욱 학문에 매진할 수 있다고 여긴 퇴계는 벗을 맺는 일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다. 다만 이것이 소위 배운 사람들의 우월의식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퇴계는 배우는 자들의 겸손한 몸가짐과 자기수양을 함께 강조했다.

 

퇴계가 제자들을 가르친 도산서원은 요즘으로 치면 서울의 연세대나 고려대 등 사립 명문대와 같은 곳인데, 퇴계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제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퇴계는 겸손한 손님맞이로 제자들까지도 놀라게 할 정도였다. 그는 젊은 유학자들의 어떠한 질문에도 성실하게 답변해 주었으며, 설령 젊은이들이 잘못된 말을 해도 바로 반박하지 않고 끝까지 듣고 나서 그것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하는 투로 말해 상대방 스스로 제 잘못을 깨닫도록 이끌어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겸손하면서도 정성을 다한 대응으로 항상 퇴계의 사랑방에는 제자나 손님이 끊일 날이 없었다. 더구나 퇴계는 귀한 손님을 잘 대접하고, 아이나 미천한 사람이라고 차별해 대접하지 않았다. 사람을 교제할 때 누구나 균등하게 예우했던 것이다.

 

퇴계는 지식 자체에 목적을 두지 않았다. 그가 가장 중요시한 것은 생활과 실천이었다. 학자가 날마다 공부하는 것은 몸을 닦고 체험하기 위한 것이지, 입으로만 이치를 논하기 위함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마음과 몸으로 그날 공부한 것을 실천하는 것이 참된 학문이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퇴계가 집안사람의 교육에서 생활교육을 특히 중시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심지어 퇴계는 서른 네 살에 벼슬하는 아들에게 학문이 부족하다며 다시 <소학> 읽기를 권했다고 한다. 기본이 되어 있지 않은 채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퇴계의 14대손인 시인 이육사(본명 이영록)는 퇴계가에 내려오는 엄한 생활교육을 받고 자신이 배운 것을 그대로 실천했으며, 그러한 자세가 결국 그를 저항시인으로 살도록 했다. 퇴계가 말한 대로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던 셈이다.

 

퇴계의 16대 종손인 이근필 씨는 이곳 도산에서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 했다. 퇴계 종손은 어릴 때부터 특별 대접을 받으며 자란다. 서너 살까지는 어머니와 한 방에서 지내지만 다섯 살 정도만 되면 할아버지 방으로 옮겨야 한다. 잠자리에서는 물론 제삿날마다 조상 이야기를 듣고 부모의 행동을 거울삼아 종손으로서의 마음가짐과 행동거지를 몸으로 깨우치는 것이다. 현재 이근필 씨는 퇴계 정신을 알리는 전도사로 살고 있다. 그가 가장 고민하는 부분은 흔히 어렵게만 알고 있는 퇴계의 가르침을 국민들에게 쉽게 전달하는 일이다. 그래서 2001년부터 선비문화수련회를 개최하고 이를 전담하는 ‘사단법인 선비문화수련원’도 만들었다.

 

 

 

제6장 해남 윤씨, 고산 윤선도 종가 : 자녀를 ‘문화의 바다’에 빠뜨려라

 

18년간을 유배지에서 보낸 고산 윤선도는 죽음을 앞두고 “중앙정계에 진출하지 말라. 혹 인연이 닿아서 벼슬자리에 오르더라도 그 자리에 연연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런 탓에 윤선도가 작고한 이후 고산가는 권력을 멀리했다고 한다. 이는 공재 윤두서에 이어 윤덕희, 윤용 등 3대에 걸쳐 문인화가를 배출하게 된 숨은 이유가 되었다. 문인화가의 길은 일반 사대부들이 가는 길이 아니었지만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고산가는 개의치 않고 자신들의 길을 고수했다. 현재 해남 윤씨 가문에는 ‘정계 금족령’이 내려서인지 정치인은 거의 없고 대신 법조인이 많다. 또 하나같이 이른바 명문대 출신들이다. 그래서 좋은 학교를 나온 것이 이 집안에서는 자랑거리가 못 된다. 대표적인 법조인으로 윤관 전 대법원장이 있다.

 

고산은 조선이 풍전등화의 시대였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와중에서 살았다. 또한 17세기는 당파싸움이 극에 달하던 때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고산은 유배 등 정치적 고난을 이겨내고 자신만의 학문세계를 구축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박학다식의 가풍이다. 고산은 당시의 사대부로서는 감히 다루기 어려운 의학, 천문, 지리, 점성, 음악 등 잡학과 기술학을 두루 섭렵했는데, 그는 이러한 학문을 연구했을 뿐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 이를 직접 응용했다. 이처럼 해남 윤씨가는 다른 양반가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개방성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는 일찍이 고산 선대에 이루어진 중국과의 교류 속에서 서양 학문을 받아들임으로써 만들어질 수 있었다. 또한 독학하는 학풍도 고산가의 특징이다. 고산은 아마도 당대에 천문을 비롯한 잡학과 기술학 분야에 정통한 스승이 없어 독학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산은 74세 때 유배지인 함경도 삼수에서 큰아들 인미에게 가훈이 적힌 ‘기대아서(寄大兒書)’라는 글을 보냈다. ‘기대아서’는 고산이 해남 윤씨가의 가훈을 가장 처음 체계적으로 기록한 글로, 후손들은 이를 소중한 훈계서로 삼아 ‘충헌공 가훈’(충헌은 고산의 시호)이라 부른다. 고산은 가훈에서 <소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경전은 심신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고 이는 모두가 일생을 두고 힘써 죽을 때까지 그만두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가르친다. 고산은 이어 ‘적선’과 ‘근검’이 가문을 일으키는 중요한 덕목임을 자녀들에게 일깨우고 있다. 고산은 혹여 후손들이 가훈을 소홀히 할까봐 마지막 부분에 “우리 가문의 흥성과 멸망이 이 한 장의 종이에 있으니 절대 그대로 보아 넘기지 말아라. 그리고 손자들에게도 명심해서 읽도록 하여 잊지 않도록 하라”고 강조한다.

 

중국의 외서 등 수많은 고서들로 ‘잡학도서관’을 방불케 한 녹우당(해남 윤씨 가문의 종가)은 조선 후기 호남의 ‘르네상스’를 이룬 산실이 되었다. 예를 들면 다산 정약용은 생전 “자신은 외가의 정수(精髓)를 받았다”고 회고할 정도로 외가인 녹우당의 장서들은 그의 학문을 영글게 하는 원천이 되었다. 고산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한 집안의 학문적인 취향이 오랜 세대에 걸쳐 지속되면 가학(家學)의 전통으로 훌륭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 대대로 수집한 수많은 서적들은 후손들이 ‘지성의 바다’에 빠져들게 하는 향기로 작용한다. 지금부터라도 부모가 앞장서 책의 향기로 가득한 집안을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자녀교육의 첫걸음은 멀리서 찾을 게 아니라 바로 집안에서 구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제7장 나주 정씨, 다산 정약용가 : 반드시 서울 10리 안에서 살아라

 

 

조선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상가로 꼽히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자녀교육을 어떻게 했을까? 더욱이 정약용은 자녀교육에 가장 힘써야 할 시기(39세~57세까지)를 고스란히 유배지에서 보낸 터라 아버지로서 교육에 힘쓰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산은 유배지에 있으면서도 자녀들에게 편지를 보내 학업에 힘쓸 것을 독려함으로써 세심한 아버지의 역할을 잊지 않았다. 편지는 상대방을 직접 대면하지 않아 감정적으로 치우침이 덜하다는 이유로 이전에 즐겨 쓰던 자녀교육법이었다. 다산이 자녀들에게 훈계한 내용은 먼저 문명세계(서울)를 떠나지 말 것, 두 번째는 독서에 힘쓸 것, 세 번째는 재물은 나눠줄 것, 네 번째는 근(勤)과 검(儉), 이 두 글자를 유산으로 삼을 것 등이다.

 

다산 정약용은 먼저 자신의 귀양살이로 위기에 처한 자녀들에게 ‘한양 입성’이라는 특명을 내린다. 서울을 떠나 산다는 것은 벼슬길이 막힌 상황에서는 가문의 적신호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교육 환경이나 정보 습득에서 시골보다 월등한 서울을 떠나 있는 것은 재기의 기회조차 잃을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는 가문의 CEO로서 다산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 한양은 외국 문물과 정보 접근 등에서 다른 지역과 비교가 되지 않는 곳이었다. 시대에 뒤지지 않은 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서울에 살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다산은 교육에서 환경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자녀교육에 적용했다고 볼 수 있다.

 

다산은 아들이 벼슬길이 막힌 것을 비관해 행여 공부를 게을리 하거나 자포자기할까 염려해 아들의 공부를 독려했다. 다산은 힘든 유배 생활 중에도 직접 자식들을 가르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면서 자녀들을 편지로 훈계하고 있다. 다산은 자녀들에게 실용적인 학문과 세상을 구했던 책을 읽으라고 거듭 강조한다. 그리고 다산은 마구잡이로 그냥 읽어 내려가기만 하는 것은 하루에 천 번, 백 번을 읽어도 소용이 없다며 세밀하게 독서할 것을 다짐했다. “책을 읽다 도중에 의미를 모르는 글자를 만날 때마다 널리 고찰하고 세밀하게 연구하여 그 근본 뿌리를 파헤쳐 글 전체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책을 읽는다면 수백 가지의 책을 함께 보는 것이 된다.”

 

대부분의 명문가에서 금과옥조로 여기는 것이 바로 부지런하고 검소한 생활이다. 다산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산은 손쉽게 상자 속의 돈을 꺼내 저잣거리로 달려가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집안을 일으킬 수 없다고 강조한다. 만약 게으르고 사치하는 일을 고치지 않는다면 아무리 기름진 땅에 집을 짓고 살아도 춥고 배고픈 신세를 면치 못한다는 것이다. 다산은 아들에게 부지런한 습관을 들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훈계한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고, 아침에 할 일을 저녁으로 미루지 말라.” 이러한 습관은 말하기는 쉽지만 실행하기에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결국 다산의 가르침은 오늘날 자녀교육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면이 있다. 다산은 고종 때 이르러 마침내 복권되면서 자손들이 과거시험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다산이 아들에게 훈계한 그 가르침으로 다시 가문이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다.

 

 

제8장 한양 조씨, 호은 종가 : 죽을 먹을지언정 더 넓은